평생 어린아이 같았던 화가 이응노 120주년 전시 제대로 즐기는 방법
by PrintedSpace
2024. 1. 7.

지금 이응노미술관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으로 기획한 ‘이응노 탄생 120주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120주년 전시와 함께 그의 삶을 연구하는 학술 연구회도 열렸습니다. 디자인 스튜디오 프린티드 스페이스는 이응노 미술관과 함께 심포지엄 포스터를 작업했어요. 마케터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응노 화백 120주년 전시를 더 제대로 즐기는 방법, 시작할게요!
이전에도 이응노 미술관에 몇 번 관람을 간 적이 있었지만, 미술 전공자가 아닌 저에게는 문자 추상 작품, 군상 작품 등 특이한 몇 가지 대표작만 머릿속에 남더군요. 그런데 이번 전시는 조금 달랐습니다. 미술관람 전 이응노 화백의 삶에 대해 예습을 해서이기도 하지만, 그의 삶의 행보에 집중하게 되는 전시의 구성이 너무 좋았거든요.
그의 행적을 따라가며 작품들을 감상해보니 한 사람의 그림이 이토록 다양한 색깔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전시를 다 보고 나면 그 다채로움의 원동력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세상을 배우듯 동서양의 새로운 문화들을 계속해서 받아들였으며 타계 직전까지도 열정을 다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완성해나갔어요.
화가의 인생을 알면 그림이 달리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응노 화백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알고사서 그의 작품을 본다면 훨씬 재밌게 관람하실 수 있을 거예요.
1.동쪽에서 부는 바람 1930년대 - 1958년
1904년에 태어난 고암 이응노 선생은 20대 초반 젊은 시절 당시 서예가로 유명했던 김규진 선생에게 서예, 사군자, 묵화 등을 배웠습니다. 당시 그가 그린 대나무와 서예 작품들을 보면 한국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묻어나 있습니다. 그는 조선 미술계에서 다수 입상하며 이름을 날렸지만 현대미술을 배우기 위해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일본에서 소묘, 유화 등 서양 회화를 공부하며 그는 점차 사군자보다는 산수풍경화를 많이 그리게 됩니다.
교육자로서의 이응노
그는 한평생 교육자의 삶을 살기도 했는데요. 10년 이상 일본에서 수학한 후 귀국한 그는 동료 화가들과 함께 단구미술원을 만들어 일본 잔재를 청산하고 한국미술 정통성 회복 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고암화숙을 설립하고 홍익대에서 강의하는 등 계속해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2.서쪽에서 부는 바람 1959-1989
1959년, 결코 젊지 않은 나이인 오십대 중반에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그의 작품 세계는 크게 확장됩니다. 오십대에 익숙한 곳으로부터 떠나 낯선 세상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는 그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그는 파리에서 활동하는 동안 붓, 먹이라는 동양의 전통 재료를 계속 사용하면서도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여 콜라주, 서예적 추상, 군상 등의 그만의 양식을 발전시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파리 사람’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외투를 입은 프랑스 사람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모습을 먹으로 그린 그림이에요. 마치 디즈니의 한 장면 같지 않나요?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눈을 반짝였을 그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새로운 문화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다
그는 1970년대부터 멕시코 등의 남아메리카 미술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남아메리카 미술의 영향을 받은 아래 그림의 화려한 색체, 기하학적 형태들이 그의 작품을 또 한번 다르게 만듭니다.
장르와 재료의 한계를 넘나들다
“나무조각 걸레조각 작품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림 아닌 것이 없어요. 그러니 조금도 걱정할 것 없어요. 자기 마음대로 하면 됩니다.”
1967년 6.25 전쟁으로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독에 갔다가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2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룹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꾸준히 작업하여 무려 300여점의 작품을 남겼어요. 감옥에서 주는 나무 도시락, 밥풀, 나무 조각들, 고추장 등을 사용하여 콜라주 작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서예, 수묵화, 콜라주, 조각, 판회, 회화 등 다양한 장르를 모두 넘나들었습니다. 한지, 썩은 나무, 신문지, 돌 등 그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재료가 되었죠.
서양에서 동양화를 가르치다 1960년대부터 -
“서양인의 뒤만 쫓아가서는 결코 국제무대에 설 수 없다.”
그의 교육열은 파리에서도 식지 않았습니다.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여 당시 프랑스인들에게 생소했던 서예와 동양화의 기초를 가르쳤거든요. 당시 이응노 화백에게 배웠던 한 학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기법에 대해 알려준다음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라고 했다.”
3.철학이 완성되다
“나의 그림은 추상적인 표현이었으나, 1980년 5월에 광주혁명이 있고 나서부터 좀더 사람들에게 호소되는 구상적인 요소를 그림 속에 가져왔다. 2백 호의 화면에 수천 명의 군중의 움직임을 그려넣았다. 우리나라 사람은 이 그림을 보고 이내 광주를 연상하거나, 서울의 학생 데모라고 했다. 유럽 사람들은 반핵운동으로 보았지만, 양쪽 모두 나의 심정을 잘 파악해 준 것이다”
인간의 형상, 저항으로 해석되는 대표작 ‘군상’

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군상 시리즈는 그가 70대에 접어들었던 1980년부터 1989년 작고하기 전까지 제작되었습니다. 미술관에서 군상 시리즈를 관람하면 캔버스의 규모, 또는 필획의 힘에 압도됩니다. 시민 운동으로 종종 해석되는 군상 시리즈는 그가 인간에게 가진 애정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힘찬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지요. 아래 그림은 그가 타계하기 얼마 전 그린 그림입니다. 붓 터치에 들어간 강한 힘이 느껴지시나요?
평생 배우는 사람이자 교육자였던 이응노
이응노 화백은 그는 타계하는 날 저녁까지도 그림 얘기를 했다고 해요. 누구보다도 솔직하고 순수한 태도로요. 그는 평생 다른 문화를 받아들였고, 또 동양의 정체성 위로 더해진 고유한 작품세계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하게 하는 힘은 그의 뛰어난 예술성도 있지만 그 뒤에 숨겨진 그림에 대한 열정, 세상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그것을 나누고자 했던 그의 삶 자체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2024년 우리는 지금 누구보다도 불확실한 시대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론 너무 빠른 변화에 지레 겁을 먹곤 합니다. 이응노의 삶은 이런 시대에 생각해볼 거리를 던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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